철학과 예술 사이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여주미술관에 <웅크린말들>이란 제목 아래 유현경, 양희애, 오지은 세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그리고 작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미술관으로부터 그림 평론을 부탁받았다. 나는 철학을 전공해서 철학책은 써봤지만 그림 평론은 해본 적이 없어 좀 망설였지만, 일반적인 평론 방식과 상관없이 그냥 내 방식대로 쓰면 된다는 말을 듣고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 이 글은 필시 전문적인 미술평론가들의 글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미술사적인 지식도, 현대미술에 대한 감각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세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내게 밀려오는 느낌과 생각을 꽤 주관적인 언어로 써내려갈 것이다. 사실은 <웅크린말들>이라는 전시 제목에 끌려서,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고립된 세계 속에 살면서도 속으로는 무한한 소통을 꿈꾸는 삶, 그 웅크림의 고통을 그들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해낼까 궁금했다.
각 작가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볼 수 있게끔 미술관 관장님으로부터 작품 파일을 받았다. 우선 유현경 작가의 작품을 열어보니, 얼굴 없는 초상화들이 눈에 띄었다. 이목구비가 모두 투박한 붓질로 뭉개지고 가려지고 사라진 유령 같은 얼굴의 초상화, 그걸 보는 순간 아찔했다.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자의 비명을 듣는 듯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내게는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시로 꿈에 등장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흩어진 살, 살아있는 자의 뭉개진 얼굴, 그 위로 녹아 흘러내리는 액체, 텅빈 눈, 바닥에 고인 피, 밤에 그런 꿈을 꾸면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나의 악몽을 나의 영혼이 아주 깊은 절망의 바닥까지 닿아 있으며, 삶이 죽음과 멀지 않음을 알고 있는 징표로 받아들였다. 나의 영혼이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존재의 깊이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여겼다. 밤에 꾼 꿈을 그리라고 하면, 아마 저런 그림을 그렸을 것 같다. 그래서 왠지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지 않았다. 나는 꿈에서 내가 본 그 지점까지, 그 공포와 전율과 아픔의 지점까지 개념을 갖고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본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개념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것은 내게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존재의 실상을 생각하게 하는 얼굴, 철학적 물음을 일으키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얼굴들을 수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모델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목구비를 갖춘 산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 드러난 형상 너머, 눈‧코‧입의 모습 너머를 그려내는 그녀는 과연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
양희애 작가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내장처럼 구불구불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들이 녹아내리리거나 부서지거나 쏟아져내리는 형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다. <당신이 바라보는 방식>에서 이목구비가 비일상적 구도로 배치된 이지러진 얼굴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간 흩어져 무로 돌아가버릴 것들을 바라보는 자의 슬픔을 그 그림 속 인물이 먼저 알아보고 눈물 흘리는 듯 느껴진다. 얼굴선의 잉크가 번지면서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는 마치 피부 뒤에 가려진 온갖 분비선들과 피와 뼈와 구멍으로 뒤범벅된 모습처럼 다가온다.
오지은 작가의 작품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장마의 기억>, <축축한 정원>, <그렇게 사랑해왔다고>, <남겨진 자리> 등에서의 강렬한 색깔과 뭉친 듯한 무거운 질감은 사라져가는 것을 잡아놓으려는 몸부림과 그럼에도 잡히지 않고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비통함, 그리고 기억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세 작가의 작품들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게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작품들은 아름다운 자연풍광의 감동적 묘사도 아니고, 부조리한 사회현실의 신랄한 고발도 아니다. 그들이 그리고자 한 것은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대상을 보는 주체의 내면이다. 그렇다고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의 감정 또는 생의 본능이나 욕망을 그리고자 한 것도 아닌듯 싶다. 그럼에도 그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 나는 그것을 ‘존재의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드러난 현상 이면의 감춰진 존재의 실상이기도 하며, 또 그 실상을 그려내는 작가 자신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형사(形似)’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상, 정신을 드러내는 ‘전신(傳神)’이 아닐까 싶다.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존재의 실상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로 정리했다. 일체 존재는 무상하고 고통이며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그냥 개념으로만 읽고 머리로만 이해한다. 무상이 불러일으키는 허무감, 고가 불러일으키는 절망감이 폐부까지 파고들어 온몸이 저리고 아픈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가면(페르조나)이 사라지고 텅 빈 허공 속에 얼굴 없는 유령처럼 등장하는 나를 바라보는 경악, 그 무아의 감정을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 보통은 그 처절하고 생생한 느낌을 개념으로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작가는 실상을 가리는 개념을 걷어내고 그 아래 꿈틀거리는 느낌을 붙잡아 그것을 화폭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존재의 실상을 여실(如實)하게 보고, 그 느낌을 여실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업은 구도자의 수행(修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존재의 실상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은 결국 그 실상이 드러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길이기에 외롭고 소외된 길이며, 따라서 그 길 위에서 그려진 작품들이 ‘웅크린말들’이란 제목 아래 모여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화가들은 왜 존재의 실상인 자신의 내면을 개념이 아닌 색깔과 형상이 있는 그림으로 드러내고자 할까? 실상에 덧붙여지는 이름과 개념들이 너무 인위적이고 자의적이며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념은 우리의 머리 속에 침투하여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짜맞추며, 선과 악, 여와 남, 미와 추, 유능과 무능, 강과 약 등 이분법적 도식을 완성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권력의 역학 구조 안에서 그 도식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렇게 개념은 대등한 것들을 위계화하고, 흘러가는 것들을 고정화하며, 춤추는 것들을 멈추게 하고, 서로 소통하는 것들을 단절시킨다. 양희애 작가의 이전 작품 <거인 가르기>, <이얍> 등은 이러한 이원적 분열의 억압적 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본다. 오지은 작가의 작품 <축축한 정원>, <남겨진 자리> 등에서 무거운 색감을 더해 형상의 구분을 약화시키는 것도 머릿속 개념의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또 유현경 작가의 이전 작품 <일반인 남성 모델>도 밖으로든 안으로든 저 이분법적 도식의 틀을 깨보려는 시도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유현경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개념적 설명을 덧붙이거나 이유를 대지 않는 것을 ‘추상’이라고 칭하였다. 개념 너머 존재의 실상을 바라보는 것은 추상의 힘이다. 그는 추상을 통해 존재의 실상으로, 피안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추상은 개념으로부터의 추상일뿐 아니라 형상, 즉 모습으로부터의 추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모습, 화가가 그리는 형상도 이미 개념의 규정을 떠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고승 의상은 존재의 실상을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즉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 일체가 끊어진다’라고 표현했다. 존재의 실상은 이름(개념)뿐 아니라 모습(형상)까지도 끊어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그림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갈수록 형상이 모호해지고 단순해지고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재현적이거나 설명적인 그림은 추상이 덜 된 작품이다. 그렇게 세 작가는 개념과 모습을 넘어 구상에서 추상으로, 현상에서 실상으로, 마음의 본래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완전한 추상은 아닐까? 나는 여기에서 ‘추상’의 역설을 본다.
개념적 분별의 인위성과 허위성, 그럼에도 그것이 갖는 폭력성과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불교는 8만4천 법문을 행하는데, 그 법문은 모두 개념적 분별로 이루어져 있다. 분별로써만 분별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마거사의 침묵조차도 침묵 아닌 법문으로 설해진다. 침묵만 있다면, 침묵의 위대함이 어찌 드러나겠는가. 마찬가지로 추상의 작업도 구상과 더불어 실행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지우고, 쌓고 다시 해체하고, 그런 행위가 존재의 실상으로 나아가는 바른 추상의 방식이지 싶다. 철학이 개념적 추상화 과정이라면, 예술은 형상적 추상화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은 개념을 갖고 개념 너머를 밝히는 작업이고, 진정한 예술은 형상을 갖고 형상 너머를 밝히는 작업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추상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이름도 모습도 모두 끊어진 자리,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 자리로 나아가 그들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그리고 싶은 것일까? ‘무명무상절일체’가 나오는 의상의 「법성게」의 첫 구절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다. 즉 ‘일체 존재의 본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이다. 존재의 실상이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고 일체가 끊어진 것은 일체 존재의 본성이 본래 둥글게 화합한 하나, 원융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 비어있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진지한 추상의 노력은 결국 그 하나에 이르기 위함이 아닐까.
추상의 결과가 그냥 아픔만은 아닐 것 같다. 모습과 이름을 모두 떠난 그 본래 자리에서 웅크린 말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서로 전달되어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일어나리라고 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우리에게 그곳 소식을 전해주는 송신자이고,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화가로부터 그곳 소식을 전해 듣는 수신자이다. 그림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춰야할 주파수를 알려주는 신호라고 본다. 우리는 너른 우주 공간에서 세 작가의 그림을 매개로 서로 만나서 복잡한 개념적 설명 없이도 존재의 실상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가 하나로 공명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웅크린말들’의 웅크림이 고통과 절망의 웅크림이 아니고, 텅 빈 마음으로 일체 존재를 모두 포용하는 웅크림, 닭이 알을 품듯이 일체 존재를 품는 사랑의 웅크림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