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JU ART MUSEUM
당신의 먼지 위에
ON YOUR DUST
박미화
2025.10.15-2026.01.04
전시전경
너의 먼지 위로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먼지. 너의 먼지 위로 바람이 분다. 꽃비가 내리고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빗물에 꽃비가 젖는다. 햇볕이 따뜻하다.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앉는다. 시간이 쌓이고 침묵이 쌓인다. 고요하다. 바람이 분다. 꽃비가 내리고 비가 내린다. 아마도 너는 내리는 빗물에 꽃비와 함께 젖을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햇볕에 너의 젖은 몸을 말릴 것이다. 그렇게 뿌리도 없고 정처도 없는 너는, 떠도는 것이 운명이고 일인 너는 꽃비가 되고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바람이 되고 햇볕이 되고 서리가 되고 눈이 된 너는 시간 없는 시간 속을, 공간 없는 공간 속을 영원회귀처럼 떠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너는 유령처럼, 유령으로 떠돌 것이다. 폴 클레는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너는 너의 비가시적인 몸으로 가시적인 몸을 가진 것들을 증언하고 증명하게 될 것이다.
원래 너는 가시 돋친 선인장을 안고 있는 피에타(연민)였고, 죽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피에타였다. 추락한 천사였고, 날개 꺾인 천사였고, 이제는 쓸모없는 꺾인 날개를 쓰다듬는 천사였다. 바닷물에 잠긴 아이들이었다. 두 살 때 도축된 홀스타인 수소 꽃다지였고, 고철 누더기 배와 함께 바다에 나갔다가 침수된 L 씨의 친구 청년이었다. 일곱 살에 사망한 카튜센카의 딸 카탸였고,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생매장당한 미상의 개였다. 구덩이에 던져진, 죽은 엄마의 젖을 입에 물고 죽은 아기였고, 노예 반대를 외치다가 교수형 당한 백인 목사 존 브라운이었다. 한국말을 잊어버린,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중국의 위안부 이수단이었고, 입양된 지 8개월 만에 죽은 소원이였다. 토끼몰이식 진압에 희생당한 대학생 김귀정이었고,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설계된, 편도 우주선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우주를 떠도는, 어쩌면 지금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떠돌이 개 라이카였다. 빈호야의 6개월 된 아기 도안 응이아였고, 해안가에 떠밀려온 죽은 난민 아기 쿠르디였다. 조르조 아감벤은 심지어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벌거벗은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벌거벗은 사람들이었다.
작가 박미화는 그렇게 너무 무거워 발설되지 못한 채 입속 동굴에 갇힌, 혀끝에 맴도는 이름들을 소환한다. 마치 일기를 쓰듯, 하루에 한 장씩, 천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며 이름과 사연들을 새겨넣었다. 그리고 합판에 커터칼로 이름들을 아로새겼다. 합판은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구조여서 칼을 대면 살이 떠 내지지 않고 찢어진다. 그렇게 거친 질감의 합판과 날카로운 커터칼의 조합이 이름들 그러므로 상처를 표현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망자와 관련한 기사가 실린, 덧칠된 신문지 위에 커터칼로 이름과 사연들을 꾹꾹 눌러 새겨 넣었다. 바탕이 종인데도, 그리고 그 위에 텍스트를 적을 다른 적당한 도구들이 있을 것인데도 굳이 커터칼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커터칼을 분노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폭력적인 사유에 어울리는 도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도가 형식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 자체 연민의 이면이라고 해도 좋을, 분노가 커터칼이라는 도구를 불러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천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이름을 새겨넣었고, 합판에 커터칼로 사연을 새겨넣었고, 신문지에 커터칼로 이름과 사연들을 아로새겼다. 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초혼의식 삼부작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작업이 다 그렇지만, 분노와 연민이 교차하는 양가감정의 소산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아로새겨진 망자의 이름들이 망각 된 기억처럼 절절하고, 애달프고, 희미하고, 흐릿하다.
흙. 그렇게 작가는 흙먼지처럼 먼지가 유래한 원형 물질이라고 해도 좋을, 어쩌면 먼지와 같은 원소를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흙을 빚어 조각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날개가 부러진 죽은 새를, 바닥에 엎어진 아기를, 바닥에 던져진 얼굴을, 표정이 없는 얼굴을, 얼굴이 없는 몸통을, 팔을, 다리를, 깨진 유리창을, 죽은 강아지를, 죽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인을, 꽃을 든 여인을, 가시관을, 마른 꽃을, 시든 꽃을, 꽃을 든 천사를, 태양을 상징하는 새 삼족오를, 고라니를, 개를 만들고 그렸다. 머리도 없고 날개도 없는 것들을, 목도 없고 팔도 없는 것들을 만들고 그렸다. 유독 꽃을 든 여인이, 꽃을 건네주는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죽은 것들에 바치는 헌화를 의미할 것이다. 오마주를 의미할 것이다. 속절없는 존재를 향한 연민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는 형상들이 공허한 것도 같고, 텅 빈 것도 같고, 꽉 찬 것도 같고, 어눌한 것도 같다. 자연이 그런 것처럼 자족적인 것도 같다. 존재자가 존재를 획득한 존재다움의 순간이,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존재의 현현이라고 부른 순간이, 사건이, 상황이 열리는 것도 같다. 그러므로 상황 조각에도 연동된, 존재의 극장이라고 해도 좋을, 속절없는 형상들을 작가는 따로 유약 처리도 하지 않고, 가마에 굽지도 않고(물론 일부 1차 소성한 경우, 그러므로 테라코타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다만 흙의 맨살 그래도 빚어냈다. 더욱이 전시가 끝나면 어떤 형상은 다시 말랑말랑한 원래의 흙덩어리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작가는 흙으로 형상을 빚고 그림을 그리는데, 때로 흙과 함께 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먼지에서 흙으로, 흙에서 재로 연이어지면서 순환하는 먼지의 계보학이, 속절없는 질료(아니면 존재)의 계통학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애도와 우울. 프로이트는 상실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해 애도와 우울(멜랑콜리)을 구분했다.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경우가 애도라고 한다면, 상실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한 채 상실에 들러 붙어있는 상태가 우울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우울을 극복하고 애도로 넘어가야 한다고 권고하지만(프로이트가 승화라고 부르는), 한편으로 꼭 그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때로 상실과 함께 우울 속에 머무는 것도, 그렇게 우울과 친해지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혹 우울을 계기로 내면이 더 깊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꽉 막혔던 내면이 아니면 심연이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쓸모없어진 날개를 쓰다듬으면서, 속절없는 존재를 부여안으면서 자기 속으로 가라앉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적. 부러진 기둥이, 누워있는 기둥이, 기둥도 없는 기단이, 흙으로 빚어 만든 비석이, 이름 모를 관이 던져진 듯이 있는, 유적지에 가면 시간 없는 시간이 흐르고, 공간 없는 공간이 있다. 세계는 허다한 이질적인 서로 통하지 않는 다른 층들로 포개져 있고, 그중 다른 한 세계가 열리고 시간이 열리고 공간이 열린다. 작가는 그렇게 다른 한 세계를 열어서 보여준다. 미셸 푸코는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는데, 그런 헤테로토피아를 열어서 보여준다. 찾는 사람도 없는 유적(지)을 보여주고 묘지를 보여준다(묘지도 유적이다).
그리고 작가는 파도에 떠밀려온 나무둥치를 보는 순간 치마를 입은 머리 없는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 한 아름 마른 풀을 안고 있는 여인의, 꽃을 건네던 여인의 원형적 어머니다. 또 다른 유적이다. 그 유적이 허물어지고 있다. 작가는 유적이 그렇게 허물어지도록, 내려앉도록, 내려앉아 낱낱이 먼지가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아마도 작가와 남은 생을 같이 가지 않을까도 싶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무덤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또 다른 유적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런 유적 앞에 서게 만든다.